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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대 설립자 해공 신익희 선생 57주기 추모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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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대학의 초대 학장이시며 대한민국임시정부 법무총장, 내무·외무총장 등을 두루 역임하며 광복 후에는 국회의장으로서 의회민주주의의 초석을 놓으신 해공 신익희 선생 57주기 추모식이 5일(일) 서울 수유리 묘전에서 해공신익희선생기념사업회(회장 남덕우) 주관으로 열렸다. 해공신익희선생기념사업회 주관으로 열린 추모식에는 신차균 국민대 부총장, 윤종웅 국민대 총동문회장, 정양성 보훈처 차장, 김유길 광복회 부회장, 목요상 대한민국헌정회장, 유가족 대표와 학생 등 200여 명이 참석하였다. 추모식은 개회사와 김충환 전 국회의원의 약력보고, 그리고 국가보훈처 차장, 광복회장, 대한민국헌정회장, 국민대 부총장의 추모사에 이어 헌화 및 분향의 순으로 진행되었다. 신차균 부총장은 추모사 대독을 통해 "해공 신익희 선생님은 민족사학 육성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오늘의 국민대학교를 건립하신 후 “讀書不忘救國” “以校爲家”를 휘호로 정하여 학구와 공사일치의 헌신을 강조하신 탁월한 교육선지자"셨다며, "숭고한 건학이념을 바탕으로 훌륭한 인재를 양성하는 기관으로 발전시킬 것"이라고 다짐하였다.
◈신익희 선생 공적 ◈ 신익희선생(1892. 7. 11~1956. 5. 5)은 경기 광주(廣州)에서 출생하여 1908년 한성외국어학교(漢城外國語學校)를 졸업하고 일본의 와세다(早稻田)대학 정경학부를 졸업한 후 1913년 귀국하여 고향에 동명강습소(東明講習所)를 열었으며, 서울 중동학교(中東學校)에서 교편을 잡다가 1917년 보성법률상업학교(普成法律商業學校) 교수가 되었다. 1919년 3ㆍ1운동 당시에는 해외 연락업무를 맡았으며, 그 해 상하이(上海)로 망명하여 임시정부 조직을 위한 비밀회의를 갖고 임시의정원 회의를 열어 국호, 관제, 정부 관원 및 임시헌장 등을 의결 선포함으로써 역사적인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탄생에 기여하였다. 임시정부의 수립과 동시에 법무차장, 내무ㆍ외무차장, 국무원 비서장, 법무총장, 외무총장, 내무ㆍ외무ㆍ문교부장 등을 두루 역임하면서 임시정부를 통한 항일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다. 광복 후에는 대한독립촉성국민회 부위원장, 자유신문사 사장, 국민대학 초대학장을 겸하였고, 1947년 남조선과도입법의원 의장과 1948년 제헌국회의원 부의장을 역임하였다. 또한 1949년 민주국민당을 결성하여 위원장에 취임하였고, 1950년 제2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어 국회의장에 피선되었다. 그리고 1955년 민주국민당을 민주당(民主黨)으로 확대ㆍ발전시켜 대표 최고위원이 되었고, 1956년 민주당 공천으로 대통령에 입후보하였으나 유세 중 서거하였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관련기사 : 4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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